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지브 간디 (문단 편집) === 인도 총리 === 어머니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4년 10월 31일 [[시크교]]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인디라 간디는 '블루스타 작전'을 펼쳐 시크교 무장 분리주의 세력들을 강경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시크교 최대 성지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이 일부 파괴된 것에 원한을 품은 시크교도 경호원들이 작당해 인디라 간디 총리를 피살한 것이다. 이후 인디라 간디 총리의 죽음에 분노한 인도인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8,000여 명의 시크교도들이 보복살해당했다.''' 하지만 인도 경찰은 딱히 이 폭동을 제지하려 시도하지 않았고 심지어 인도 국민회의 간부들이 이 폭동을 뒤에서 조장하기도 했다는 루머까지 돌기도 했다. 심지어 라지브 간디 역시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면 땅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라고 발언하면서 인디라 간디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라지브 간디는 어머니 인디라 간디가 사망선고를 받은 지 몇 시간만에 바로 인도 총리로 지명된다. 라지브 간디 총리는 총리직에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 총선을 치를 것을 요구했고, 공식적으로 인도 국민회의 당대표직에 오른 뒤 1984년 총선을 '''압도적인 대승'''으로 이끌며 지지기반을 단단히 했다. 이때 인도 국민회의와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 간디의 암살에 따른 동정여론에 힘입어 543석 중 411석을 차지하며 역사에 길이남을 압도적인 승리를 따냈다. 뿐만 아니라 라지브 간디의 신인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와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워보이는 듯한 인상도 꽤 영향을 미쳤다. 라지브 간디는 1984년 12월 31일 총리 취임 선서를 했고 인도 최연소 총리로서 정계 입문 3년 만에 총리직에 오르는 대기록을 썼다. 라지브 간디가 총리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반란표 금지법' 통과였다. 이 법은 1985년 1월에 의회를 통과했는데, 내용은 한 번 의원이 뽑히고 나면 다음 총선이 실시되기 이전까진 정당을 함부로 옮길 수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워낙 부패가 판을 치던 인도 정계에서 의원들이 대가를 받고 정당을 옮기거나 당내 분란이 있을 때마다 사분오열해서 찢어지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 당장 1980년에만 해도 인디라 간디에 반발한 당내 지도부를 포함한 수많은 의원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탈당해 다른 당으로 옮겨가며 정계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1985년에는 유명한 '''샤 바노 사건'''이 터졌다. 인도 대법원은 1985년에 이혼한 [[무슬림]] 남편이 이혼녀인 샤 바노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줘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야 당연한 판결이었지만 무슬림들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이번 판결이 선례가 되어 이혼시 남편이 아내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되는 걸 우려했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정부를 압박했다. 무슬림들의 목소리를 함부로 무시하긴 어려웠던 라지브 간디 총리는 무슬림들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1986년 잇다(Iddah)[* 이슬람법의 재혼금지기간으로 오직 여성들에게만 적용된다. ] 기간에 이혼한 경우, 아니면 이혼 후 90일까지만 생활비를 지급하면 된다는 내용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고야 말았고, 이로 인해 인도 무슬림의 여성 인권은 상당히 후퇴하게 된다. 법안을 주도했던 라지브 간디 총리 역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전문가들은 '소수 무슬림들의 목소리를 듣겠답시고 나라를 뒤로 후퇴시켰다'라고 맹비난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점차 나라의 민영 부문을 늘려나갔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외국 자본의 유입을 들여오려 시도했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의 자유주의화 시도는 바로 난관에 부닺히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인도 국민회의 정당 자체가 좌파 정부였고 인디라 간디의 폐쇄주의, 보호주의적 경제정책을 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도 국민회의 당 수뇌부 역시 라지브 간디의 정책이 부자들만 더 잘살게 만들 것이라 비난했고, 시골과 농촌에 사는 압도적 다수의 농민들 역시 라지브 간디의 경제관을 비판하자 라지브 간디 총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이후에도 경제 개발에 대한 꿈을 아예 버린 것은 아니어서 'License Raj'라고 하는 거래허가증 제도를 대폭 축소해 기업들이 정부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라서 이 제도 자체는 90년대까지 쭉 존속된다.] [[과학기술]] 개발에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자하거나 기술산업에 관세를 줄여주는 등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인도 전역의 고등교육을 확장하면서 교육의 질을 상승시키려 노력했고, 시골 곳곳에 공중전화선을 까는 업적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